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새는 외로운 투쟁을 하지 않는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불교의 선종의 불서인 <벽암록>에는 ‘줄탁동시’라는 한자성어가 있다. 줄탁동시는 어미 닭과 병아리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병아리의 부화를 묘사한다. ‘줄’은 병아리가 알 속에서 쪼는 동작을, ‘탁’은 어미 닭이 알 바깥에서 병아리를 도와 부리로 알 껍질을 쪼아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줄과 탁이 ‘동시’에 어우러질 때 한 생명이 태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한자성어는 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방법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사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 층 더 깊게 들여다보면 어미 닭은 절대로 껍질을 먼저 깨지 않는다는 진실이 숨어있다. 실제로, 부화할 때가 된 병아리가 알 속에서 여리디 여린 부리로 껍질을 쪼으면 어미 닭은 껍질의 반대 편에서 소리를 내어 반응해준다. 어미의 소리는 병아라에게 방향만 인도할 뿐 껍질을 대신 깨어주지는 않는 것이다. 껍질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은 온전히 병아리 스스로의 몫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병아리의 부화에 관한 사실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도 닮아있다. 특히 데미안이 에밀 싱클레어의 성장을 유도하기 위해 들려주는 두 이야기가 떠오른다. 세상을 늘 친숙하고 따듯한 ‘밝은 세계’와 낯설고 두려운 ‘어두운 세계’로 나누어 바라보던 싱클레어에게 있어 데미안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첫 번째 이야기인 ‘카인과 아벨’은 싱클레어에게 어두운 세계에 속하는 것들은 사실 어두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가르쳐준다. 이는 세상은 오직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또는 선한 것과 악한 것 같이 이분법적으로만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어 두 번째 이야기인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을 통해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허용된’ 것과 ‘허용되지 않은’ 것을 접할 때 어떠한 힘에 이끌려 선택하기보다 자신만의 온전한 주체를 바탕으로 받아들일 것을 조언한다.
어미 닭과 마찬가지로 데미안은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싱클레어가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돕지만 절대로 그를 일방적으로 잡아 끌지는 않는다. 그저 싱클레어가 먼저 찾아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결국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성장한다. 이후 내면을 성찰할 수 있게 된 싱클레어는 어떠한 유혹과 위협과 변화가 엄습해도 자신만의 길을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나는 줄탁동시를 통해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관계에서 인류의 역사 저편으로부터 전해져 온 전통적인 멘토링을 엿볼 수 있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이끌며 그의 성장을 돕고,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지도를 받들어 깨달음을 얻는다. 당연해 보이는 이 사제관계가 다른 사제관계와 차별되는 건 이 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이해와 유대이다.
오늘날 우리의 데미안은 어디에 있는가
<데미안>을 읽고 데미안 같은 스승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스승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학교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모든 청소년들에게 보편화된 교육을 제공하고, 학생들은 이 교육의 틀 안에서 여러 스승을 만난다. 그러나 학교의 선생님들은 일반적으로 데미안 같은 스승으로써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것 같다. 학생들의 배움에 관한 경험이 항상 싱클레어와 같이 깨달음의 열매를 맺는 데 초점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에서 학생들에게 깨우침을 선사하는 모체는 멘토가 아닌 조금 더 한정적이고 고정적인 지식에 머무른다.
그렇다면 한국의 교사들의 역할은 무어란 말인가? 그들은 기본적으로 약 20~40명 정도의 학생을 맡아 그들과 밀착해 시간을 보내며 사회성을 기를 수 있도록 해주고, 수학, 영어, 국어 등의 지식을 가르치며 지적 성장을 도모한다. 사실 이것들도 필요한 배움의 내용이긴 하나 이 배움 뒤에 자리하는 입시가 교육의 취지와 충돌한다. 학생들은 주체적인 바탕은 생략한 채 지식을 전수받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적 깨달음의 뒷면에는 ‘왜’라는 목적이나 철학이 빠져있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지식과 사회성을 겸비한 학생들은 소위 말하는 일류 대학에 진학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업한다. 그 뒤, 그들의 인생에는 뭐가 있을까, 결혼, 가정, 혹은 부의 축적? 결국 이 길의 끝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안정적인 노후뿐이다. 삶에 있어 재정적 안정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요소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치열하게 산 우리의 인생 마지막 순간을 위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싱클레어는,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시인으로 혹은 광인으로, 예언가로 혹은 범죄자로 끝장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구나 관심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의 속에 완전히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우리는 배움과 취업과 그리고 안정적인 노후라는 굴레에서 어떻게 우리 자신에게로 갈 수 있을까? 다행히 병역이라는 기간이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데미안이다
헤세가 묘사하는 데미안은 사실 완벽한 인간상에 가까운 초인이다. 작품 속에서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고,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이해해주고, 한 발 앞의 걸음을 인도하는 데미안과 같은 인물을 현실에서 만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물며, 그런 사람이 인생의 멘토가 되어 나를 이끌어준다는 건 터무니 없는 일이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은 것들은 때로 완벽하지 않기에 더욱 가치있다고 했던가.
군에 입대한지 이제 곧 6개월 차에 접어드는 나는 아직도 우리 부서에서 막내이다. 아직은 아랫사람보다 윗사람이 더 많은 시기이기에 여느 직장인이나 장병들처럼 사소한 일로 서운하다든가 억울하다든가 혹은 오해가 생긴다든가 하는 일들이 종종 있곤 하다. 그럴 때면, 내 선임에게 찾아가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그는 묵묵히 들어주고 공감해준다. 대화의 시제는 과거에서 출발하지만 곧 머지않은 미래로 도약한다. 그리고는 늘 “우리가 선임이 되면”과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일상적인 것부터 그 어떤 주제든 간에 그는 항상 내 말을 잘 들어주며 받아준다.
우리 선임에게는 개인적으로 감사한 마음이 크다. 그는 일은 많은데 사람은 없을 때 우리 부서에 들어와 힘들게 일을 배우며 적응했다. 우리 부서의 특성상 인수인계를 받는 과정도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이 모든 시간 안에서 그는 일뿐만 아니라 배움을 전달하는 방식까지 몸에 새겼는지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줄 때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운 방식에 자신의 견해를 더해 개선된 방법으로 나에게 가르쳐 주는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절대 완벽하지 않을뿐더러 나보다 더 풍부한 인생 경험을 가졌다거나 사회생활을 더 길게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부족하다면 부족한 만큼 자신의 위치를 알려고 하고, 필요한 만큼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과 소통을 통해 이해할 수 있으려 한다. 그러면 나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메시지 하나 하나를 받들어 내 것으로 삼는다.
끝으로
서문의 인용구는 책에서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보낸 짧은 편지의 일부로 가장 <데미안>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이다. 그러나 사실 뒤에 오는 두 문장이 책의 상징성과 핵심을 더욱 짙게 포괄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아브락사스란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지닌 어떤 신성" 이라는 의미로, 편지의 내용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분법적인 것들을 모두 이해하고 있을 때 자신의 온전한 견해로 바라볼 수 있게 됨을 뜻한다.
데미안이 보낸 편지의 직접적인 내용은 이분법적인 시각을 표적으로 삼지만, 우리는 어린시절의 싱클레어처럼 세상을 단순하게 보지만은 않는다. 또한 우리 모두 현재 삶을 저버릴 수도 있는 행위를 하기란 쉽지 않다. 현실에는 데미안과 같은 초인적인 스승도 없다. 그러나 타인과 더 활발하게 소통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서로에게 있어 데미안이 되어 서로를 이끌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데미안>을 읽고난 뒤의 나는 그렇게 내 선임의 지혜에 나의 지혜를 얹어 내 선임의, 그리고 훗날 있을 내 후임의 데미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