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이 책은 직관과 믿음, 진실에 관한 책이다.
책에서 주로 다루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스탠포드 대학의 초대 총장을 맡았고, 현재까지 발견된 어종중 약 4분의 1에 달하는 어종을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닥쳐 자신이 수집한 어류 표본이 엉망으로 뒤섞였을 때도 물고기의 피부에 이름표를 꿰매 붙여 자신의 업적을 되살려냈을 만큼 끈기의 대명사다. 조던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믿음’ 때문이었다.
30년의 업적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걸 지켜보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저자가 조던에게 강하게 매료된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순간 안에서도 묵묵하게 운명에 맞서 싸우는 모습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아버지로부터 ‘인간의 무의미성’에 대해 주입받은 저자는 조던이 가진 “파괴되지 않는 [믿음]”의 원천을 궁금해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굳센 믿음은 조던은 파괴해버리고 말았다. 그의 업적은 그를 우생학이라는 그릇된 사상으로 이끌었고, 조던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한 외길을 걸었다. 조던의 믿음은 결국 우생학의 제도화를 포함해 수많은 결과를 낳았다. 책에 등장하는 애나는 수많은 비극의 주인공들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애나의 배에 불거진 흉터에 대해 생각했다. 자기 몸을 내려다볼 때 대법원이 인정한 무가치함의 스탬프가 보이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보랏빛 리본 같은 그 흉터가 사실은 하나의 선물로 의도된 것임을, 아마도 그들이 원한 방식이었을,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생을 끝까지 살도록 허용해주는 국가의 자비였음을 아는 건 어떤 느낌일까. (136)
조던의 이야기는 “무언가를 향한 믿음이 너무나도 강해져버린 나머지 배제와 파괴를 낳아버렸다”는 이야기로 일축된다. 이는 살면서 어디선가 들어볼 수 있는 흔한 이야기다. 믿음에 근거한 행위는 결정적이지만 그래서 때론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강력하기도 하다. 특히 그 믿음이 세상을 향할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잣대로 세상을 규명한다는 건 그 자체로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어떠한 ‘법칙’에 의해서 흐르지 않는다. 자연을 분류한다는 터무니없는 시도는 인간의 방식으로 자연을 그냥 이해하는 시도에 불과하다. 세상은, 자연은 단지 인간에게 무심할 뿐이다.
결국 저자의 아버지는 틀리지 않았다. 이 장대한 세상에, 자연에 비하면 인간은 아주 작고 미미한 존재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삶에서 이룰 수 있는 일들은 하찮고 보잘것없다. 세상에게 우리는 단지 점 위의 점일 뿐이다.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38)
책을 다 읽은 뒤, 생각을 조금 정리하면서 내 뇌리에 박힌 한 줄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의미 같은 건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것은 좀 더 큰 관점에서 볼 때의 이야기고,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내가 보고 느끼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내 시간 안에서 흐르는 내 삶이니까.
삶에서 믿음은 과연 어디에 뿌리내려야 할까. 결국 진실은 진실이고,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다. 자연은 단순히 자연이다. 나는 내 인생을 살고, 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건 그다음 문제다. 결국 나만의 믿음을 추구하면 된다. 그것이 세상을 향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삶에서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 감정의 유대에 믿음을 두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각자 누군가의 삶에서 소중한 존재이고, 그것만은 나와 그 사람에게 자명한 진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