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노왁과 로저 하이필드의 <초협력자>를 읽고.
마틴 노왁과 로저 하이필드의 '협력'에 관한 메시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건, 시스템, 그리고 형태를 꼬집는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나아가 인류사회가 살아가고 있는 문화. 둘째는 우리가 어떤 집단의 개인으로서 다른 누군가를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
첫째로,
우리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협력이 부재한 문화를 양산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체계가 협력보다는 경쟁을 기본적으로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는 서로 협력하기보다 경쟁하기를 부추긴다. 이는 큰 틀에서 국가적 노동력과 생산성을 증진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문화적인 측면에서 집단의 구성원들이 자신밖에 챙기지 못하게 만들며 이기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집단의 구성원들의 생산 능력은 국가적 차원에서 협력적일 수 있겠지만, 이는 다른 시각에서 봤을 때 우리가 생산적인 측면 이외에는 협력할 수 없는 존재가 됐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에게 있어 협력은 우리가 집단으로써 나아가기 위한 경쟁이었다.
21세기의 한국은 그 어느 때보다 신자유주의에 열광한다. 자유로운 시장과 경쟁을 추구한다는 이야기이다. 자연스러운 시대적 흐름이다. 일제강점기와 남북전쟁 이후 세계적으로 가난했던 한국이 빠르게 일어설 수 있었던 주된 비결이 바로 대기업과 의무교육의 확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재를 효율적으로 발굴하고 육성시키는 일은 국가적 차원에서도 중대한 니즈였다. 특정 소수의 성장은 곧 국가의 성장으로 직결되었기에. 그리고 이 과정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시험과 상대평가를 통한 경쟁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체제의 씨앗은 경제 성장이라는 열매를 맺었고, 곧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아이덴티티로써 자리 잡았다.
기업은 경제활동의 기회를 창출하고 국가는 교육으로 인재를 육성한다. 이 당연한 그림이 한국 사회에서 그려지기 위해서는 부가 조건이 필수적이다. 바로 서열화이다. 한국 사회에서 기업과 인재는 서로 경쟁하고 평가받으며 각각의 능력에 걸맞다고 매겨지는 등수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늘 그랬듯, 능력에 걸맞은 부와 지위를 받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 토양에서 교육 체제는 이전의 경제 성장과는 다른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엘리트들을 둘러싼 의혹을 보면서 이 현실을 절감했다. 교육 경쟁을 통한 소수의 출세는 범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이익일 수 있겠지만, 범사회적인 차원에서의 이익과 더는 직결되지 않는다. 그동안 교육 입시에서 명문대학 진학은 교육에서의 경쟁의 참여자들에게 보상으로서 주어져 왔다. 특정 학벌에 소속됨으로써 주어지는 메리트는 개별 구성원에게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 취득으로의 기회를 제공해왔다. 우리 경제는 그렇게 개인과 사회의 상호관계를 통해 팽창해왔다. 그러나 클 대로 큰 한국은 더 이상 이전 같은 방식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
'끝없는 입시 경쟁'이라는 수식어는 '입시경쟁을 거쳐 최종적으로 어느 학벌에 소속되느냐'라는 의미로 철저하게 결과주의적인 측면의 이 보상의 분배가 이루어졌는지를 묘사한다. 하지만 경쟁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사람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듯, 오늘날 한국의 입시 경쟁에도 소위 패배자가 존재한다. 보상을 분배받지 못한 자들, 즉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 취득의 기반이 되는 ‘좋은 학벌’을 얻지 못하는 절대다수이다. 불황한 경제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좋은 학벌이 여전히 개인이 기대하는 부와 지위를 가져다줄 수 있을지에 의문을 품는다.
이 경쟁체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보상과 처벌의 구분'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이 둘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경제적인 부의 결과 차이는 이들을 가르는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경쟁의 정도가 일정 상한을 넘기 시작하면 경쟁이라는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이 얼마나 큰 노력을 쏟아붓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목표는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처벌의 경계를 넘는 집단에 속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십 대의 소년·소녀들은 중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에 아무렇지 않게 적분과 미적분 문제를 풀 수 있게 되며, 고등학교 재학 중 학급 임원을 맡고, 성적관리를 하고, 동아리와 학내외 공모전에 참여하고 수상하며, 학술 연구에 참여하고 논문에 이름을 써 올리는 세계에서 전무한 슈퍼맨으로 탈바꿈한다.
이러한 경쟁의 구도는 한국 사회를 비롯한 세계 전반에서 엿볼 수 있다. 이익 집단으로 탈바꿈하여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를 쓰고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국내 언론사들은 끝없이 경쟁하고, 이러한 언론의 행태는 현재 한국 언론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실적 올리기에 바쁜 몇 정부 부처들은 장기적인 결과보다 또는 이전 정부 부처의 실적에 비교해 단기적인 이익을 좇아 불완전한 정책을 생산한다. 국제 사회에서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기후변화 협력을 탈퇴하고 국제 사회에서 경쟁을 심화시킨다. 이 모든 현상은 누가 자본을 더 많이 가졌는가에서 비롯되어 한국 사회 전체, 나아가 인류 전체를 협력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둘째로,
나는 저자가 행한 협력에 관한 여러 실험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가지는 태도에 관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TFT (팃포탯: Tit for Tat) 혹은 WSLS (이기면 그대로, 지면 이동: Win Stay, Lose Shift) 전략에서 배신은 배신을 낳는다, ' '배신자는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처벌함으로써 응징한다, ' '만일 다른 사람이 배신한다면 나도 배신하는 게 낫다, ' 등의 언구들은 우리가 살면서 흔히 듣는 한 가지 말을 떠올리게 한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초협력자>에서 언급된 여러 실험에서 배신과 처벌이라는 두 행동 양상은 모두 '복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호의를 베푼다 (낯선 이가 길을 물어보거나 누군가 다리 위 난간에 서 있을 때, 또는 누군가 길거리에 쓰러진 이를 일으키며 도움을 요청할 때 등. 나는 적어도 그렇게 그렇게 믿는다). 이 호의가 악의로 역전될 때, 협력이 배신으로 탈바꿈할 때는 다른 이나 집단의 배신을 경험할 때 혹은 그들로부터의 처벌을 경험할 때이다. 우리는 남을 혐오하고 적대하며 복수와 배신, 처벌을 반복한다.
노왁은 실험 도중 한 집단에서 배신이 협력을 넘어 우세하는 현상을 목격한다. 그러나 모두가 배신하는 집단에서 협력자들의 등장은 항상 배신자들에 우세를 보이며 곧 집단을 장악한다. 이를 두고 저자는 말한다. 죄수의 딜레마를 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처벌이 아닌 용서와 관용이라고. 우리가 지금껏 쌓아 올린 종교와 과학의 가르침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제 이 책을 읽은 우리는 저자의 GTFT (너그러운 팃포탯: General Tit for Tat) 전략이 죄수의 딜레마의 배신과 이기를 뛰어넘는 것을 보여주듯이 관대와 용서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국가가 더욱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경쟁에서의 패배는 개인이 의무적으로 해야 할 노력과 채제에 대한 배신과 처벌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쉽게도,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몇 가지 질문이 남는다. 저자는 협력에 있어 많은 교훈이 '베푼 만큼 돌아온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노왁은 베풂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기적인 이익이 배신을 통해 취하는 편익보다 크다고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그렇다면 저자의 주장 일축은 '우리는 배신보다 협력에서 더 큰 개인의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협력해야 한다'가 되는가? 정녕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혹은 그것만이 협력할 수 있는 길이라면 협력의 사회에서도 우리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또는 협력자로써서의 권위를 위해 '협력의 경쟁'을 낳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까?
그렇기에 나는 저자가 언급한 아인슈타인의 어록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처벌을 두려워하고 보상을 바라는 마음 때문에만 사람들이 착해진다면,사실 우리는 불쌍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