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석의 <아파트 한국 사회>를 읽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도덕 수업을 들을 때면 빠지지 않고 배우는 내용 중에 이웃과의 예절이 있었다. 동네의 웃어른들을 만날 때면 공손히 인사를 한다던가 새로 이사를 할 때면 떡을 돌린다든가 하는 등은 우리 삶에 이웃과의 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는 과목일 터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파트에서밖에 살아본 적 없던 당시의 내게 이는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현실감 없는 풍경이었다. 내게 우리 고유의 문화라는 "정"은 초코파이 선전에서나 볼 수 있는 한 자전거를 같이 타는 고등학생 남녀가 가지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유학을 시작했다. 함께 지내던 사촌 누나와 호스트 가족 모두 한국에서는 꿈꾸기 힘든 개인 주택에서 살았다. 심지어 사촌 누나가 주택으로 이사하기 전에 살던 "아파트"라고 불리던 건물은 한 채에 4가구가 들어 사는 이전에는 본 적 없는 형태의 아파트였다. 당시에는 '넓은 땅덩이 덕분일까'라는 생각과 함께 '아, 이래서 다들 해외를 이야기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더 이상하다고 느낀 건 주말 마당에서 아침 조카들과 놀아줄 때 종종 일어났다. 집 앞을 지나는 보행자나 이웃들이 반갑게 인사하며 안부를 묻더니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아닌가. 도덕책에서나 보던 이웃과의 교류를 한국에서는 생전 경험해본 적 없다가 미국에서 그 따뜻함을 처음으로 느껴보니 기분이 참 싱숭생숭했다.
방학에 한국 집으로 돌아올 때면 미국과는 대조되던 이웃과의 온도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같은 단지, 같은 동, 옆 호수에 살아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도 우리는 서로 인사는커녕 경계하며 없는 사람인 양 무시한다. 최근에는 '이 사람은 이 동네의 주민이 맞나?' 혹여는 '날 해치지는 않으려나' 같은 걱정이 더 앞서기도 한다. 요 몇 년간 주거 범죄가 더 잦아졌기 때문일까? 집에 갈 때의 묘한 긴장감은 (아파트 내부의) 계단형 혹은 편복도형의 삭막한 공간을 지나 여러 칙칙한 문들 중 내 집의 호수가 붙은 하나를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 가라앉지 않는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도시 생태계를 기존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삶터로 분류한다. 빌트에서 아그라왈이 이야기한 것처럼 건물은 더욱더 높아졌고, 우리는 여전히 옹기종기 모여 산다. 이 발전에 더불어 우리가 사는 공간의 밀도 또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더는 우리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떠들며, 관계 맺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더는 3차원적인 지리적 한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옆집에 사는 사람을 굳이 돕거나 챙기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진 관계를 좇으며 거기에 충실히 한다. 이렇듯 현대 도시에서 산다는 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연결된 삶을 산다는 데 있는 것도 같다.
우리 삶은 더 편해졌지만 이건 과연 좋은 변화일까? 딱 잘라 대답을 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한국의 아파트 사회는 피할 수 없는 길이었던 것도 같다. 저자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고 질문하듯 한국의 경제 성장과 아파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모든 일에는 '균형이 있다'는 점이다. 당장은 큰 문제 없어 보이는 것 같아도 저자는 경고한다, 아파트 단지 사회가 초래하는 결과는 인제야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저자의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 키워드로 요약된다. 단지와 담장 그리고 발코니. 사실 아파트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아파트의 "단지화"에 있다고 한다. 이는 시민 모두가 오가며 누릴 수 있던 땅을 사유화시켜 기생충처럼 공공공간을 조금씩 좀 먹는다. 담장은 아파트의 단지의 출입을 통제하며 사유화를 완성한다. 우리가 길로 다닐 때 큰 아파트 단지 블럭을 빙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발코니는 겉으로는 아파트 건축에 있어 내부 공간에 서려있는 문제를 지적하는 듯 보이지만, 이는 사실 우리 개개인이 맹신하는 개인중심적이고 자본주의적 태도를 지적한다.
이는 오늘날의 삭막한 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더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일상이었던 이웃과의 교류 때문인지 한국의 도시는 더욱 삭막하게만 느껴진다. 우리는 여전히 집 밖으로 한 발자국만 걸어 나가도 사람이 가득한 공간에 살고 있지만 온갖 정신질환을 앓고 외로움에 몸부림친다. 그리고 정작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옆집 이웃에게는 낯설어하고 경계한다. 어쩌면 저자의 의견처럼 해답은 우리가 일상을 경험하는 공간을 작은 것부터 바꾸는 데 있는 것 같다.
나와 너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장을 허물어 보자. 그리고 길을 걷다 이웃과 부딪며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어 보자.